김원봉이 연일 검색어에 오르 떤 인물인지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있습니다. 현충일을 맞이하며 문재인 대통령이 추념식에서 김원봉을 언급하며 논란을 불러 일으킨 것은데요. 과연 김원봉은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약산 김원봉은 1898년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무장 독림 운동가 입니다. 독립 운동가 이지만 남한 북한 모두에서 철저히 외면당한 분단의 대표적인 희생양입니다. 왜 김원봉은 독립운동가 임에도 불구하고 남한 북한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일까요?
김원봉은 일제 강점기 떄 의열단장과 조선의용대장, 광복군 부사령관, 대한민국 임시정보 국무위원 및 국무장으로 활약 하였습니다. 일본이 의열단장 김원봉에게 무려 100만원 현재로 환산하면 약 320억원의 현상금을 걸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였습니다.
임시정부 수장이였던 김구 선생에게 걸었던 현상금이 60만원에 비해 어마어마한 현상금으로 김원봉이 일제에게 얼마나 두려운 인물이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분단 상황에서 월북을 선택한 김원봉은 김일성 전 주석의 1인지재 체재 구축과정에서 수축 되었고 남한에서는 월북을 이유로 독립운동 경력이 묻혀 버린인물입니다.
김원봉이 남북 협상 때인 1948년 월북할 당시만 해도 소련 군정체제 아래의 북한 정권은 김일성 유일지배가 아닌 국내외에서 독립을 위해 싸웠던 소련파와 연안파, 국내파, 남로당파, 김일성의 빨치산파 등 다양한 파벌로 형성된 집단지도 체제였습니다.
항일운동으로 전국적 명성을 떨쳤던 김원봉은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1기 대의원,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에 올랐고, 6·25 전쟁 때는 ‘군사위원회 평북도 전권 대표’와 노동상으로 활동하며 북한 정부의 훈장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후에도 노동상과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북한의 대남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는 2015년 10월 게재한 글에서 김원봉이 주도한 광복군에 대해 ‘우파 무장단체’라고 규정하면서 “몇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일제 패망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그것이 조국 해방의 ‘결과’를 안아왔다고 운운한 것은 자화자찬과 미화 분식을 넘어서 완전한 역사 왜곡”이라고 평가절하한 바 있습니다.
김원봉이 숙청 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우즈베키스탄에 살던 그의 아들이 1994년 반북 인사들과 함께 서울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김원봉의 아들인 김로베르트씨는 당시 김일성 정권의 정치적 탄압을 피해 50년대 말과 60년대 초 해외로 망명했던 북한의 전직 고위인사들과 함께 서울에서 열린 ‘북한의 민주화와 인권 회복을 촉구하는 대회’에 참석했다고 합니다.
김원봉은 이런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48년 김구를 따라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북한에 남는 것을 선택했습니. 역사학자인 전우용은 7일 페이스북에서 김원봉은 김일성 일파의 숙청을 피하여 탈북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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